도시를 걷는 여자들

🔖 우리가 짓는 건물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이 반영되기도 하지만, 건물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결정되기도 한다. "도시는 집단적 불멸성의 시도이다."라고 마셜 버먼은 도시의 폐허에 대한 글에서 말한다.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우리 도시의 형태와 구조는 지속되리라고 기대한다." 교외에서는 정반대가 진실이다. 교외는 역사가 없고 미래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속되게끔 지어진 것은 거의 없다. 진행 중이며 끝나지 않는 현재를 사는 문명에게 후대는 무의미하다. 아이에게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과거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전이 된 루이스 멈퍼드의 1961년 연구 <역사 속의 도시>는 교외의 거주민이 "세상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시각", 전적인 정치적 무관심까지는 아닐지라도 안전하다는 헛된 믿음을 유지하게 하는 천진난만함 같은 것의 존재를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라도, 이곳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

나는 제리코 유료도로로 차를 몰고 가며 가건물 같은 건물들을 보면 화가 난다. 우린 더 나은 것을 누릴 수 있지 않나? 인간은 어디에 데려다 놓든 잘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환경은 중요하다. 환경은 결정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결정한다. 우리 아버지가 건축계에서 스승으로 생각하는 루이스 칸은 학생들에게 보(*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나무)처럼 생각하라, 보처럼 느끼라, 무엇이 너를 미는지 무엇이 너를 끌어당기는지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게 건물을 통해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이게 내가 도시를 통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 그때 그 도시에 깃든 유령이 있었다. 도로시 파커나 이디스 워튼이나 혹은 내가 아직 읽지 않은 누군가의 유령. 배로 스트리트에 있는 오래되어 기우뚱한 건물 안에, 미드타운 터널에서 나오면 바로 등장하는 머리힐의 브라운스톤 건물에 있었다. 웨스트엔드 애버뉴의 책이 빼곡한 아파트에 있었다. 낡은 화장실 네모난 타일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유령을 내 글에서 포착하고 싶었다. 내가 그 유령이 되고 싶었다. 연구조교가 되려고 면접을 보았을 때 나를 면저 뽄 여자가 앨곤퀸 호텔 바에서 술 한 잔을 사주었는데 그때 생각했다. '이거야. 나도 여기의 일부가 된 거야.'


🔖 하지만 만약 그녀가 그곳에 갔는데 거기가 천국이면 어떡하지?

— 진 리스, 뤼 드 라리베에서In the Rue de l'Arrivée


🔖 미완성 자서전 <제발 웃어요>에서 밝히기를 리스는 어떤 프랑스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내 몸에서 나를 분리할 수 있어요.' 남자가 하도 충격을 받은 얼굴이길래 내 프랑스어가 이상하냐고 물었다. 그는 '아 아니요, 하지만...... 끔찍하네요.'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리스의 인물들은 수동적이고 정적이고 침체된 상태로 세상의 어떤 가혹함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켄지 씨를 떠나고>에서 줄리아는 런던에 가서 택시 운전사에게 아무 데로나 데려가 달라고 해서 묵을 호텔을 정한다. <한밤이여 안녕>에서 사샤는 "스물네 시간 중에 열다섯 시간을 잘 수 있게" 베로날을 과용한다. <사중주>의 주인공 마리아는 "무모하고 게으른 천성적 방랑자"로 묘사된다. 어떤 선택도 스스로 하지 않고 그저 계속 "결국 그렇게 된다"고만 한다.


🔖 <매켄지 씨를 떠나고>에서 줄리아에게 매켄지를 만나기 전과 후가 있었듯이, 리스에게도 포드 전과 후가 있었다. 포드가 리스에게 작가의 삶의 본질인 고통을 안겨주었다기보다는, 리스가 자기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음을 깨닫도록 이끈 촉매가 포드였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게 바로 리스가 겪은 불행의 원인, 리스가 술을 마시도록 몰고 간 원인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리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관점의 차이"라고 부른 것으로 세상을 봤다. 리스가 만들어낸 여성 인물에게서 이런 면이 드러난다. 이들은 옷을 제대로 입지도 말을 제대로 하지도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한다. 너무 이야기를 많이 하거나 너무 적게 하거나 잘못된 이야기를 한다. 도시에 오면 우리는 이제야 나 자신으로 살 수 있구나 싶지만, 파리에서조차 다른 사람의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리스가 쓴 단편 중에 프랑스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기다리며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 영국 여자가 나오는 단편이 있는데, 거기에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기계 밖에서" 산다는 말이 나온다. 여자는 간호사나 다른 환자들이 "기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힘, 확신" 이 있지만 자기에게는 그런 게 없으며 그들이 자신의 결함을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계는 언제나 옳으며 망가진 부분을 제거하는 힘이 있다. "'이 사람은 쓸모가 없어.'라고 그들이 말할 것이다." 리스가 1969년에 쓴 단편 <낯선 이를 알아채다>는 전쟁 중 영국이 배경인데 주인공 로라는 기계의 일부가 되었다. 기계는 로라를 통합시키려 하면서 파괴한다. "모든 것, 모든 사람에 기계적 특성이 있어 겁이 났다. 지하철 표를 사고, 버스에 타고, 가게에 들어가고 할 대마다 나는 기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맞물린 톱니바퀴의 톱니 한 개가 된 기분이었다." (...) 규칙, 기계, 게임. '삶에 대한 네 시각이나 태도는 전부 다 말이 안 되고 잘못이다.' 리스의 여자들은 게임을 할 수가 없다. 리스의 인물은 비인간적이고 자의적인 규칙, 자기에게 불리한 규칙을 거부한다. 왜 저 여자는 적응하고 사는 척하지를 못하지? 주변 사람들 모두 의아해한다. 별로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다. "올라타거나, 아니면 꺼져야 한다." <어둠 속의 항해>에서 애나는 생각한다.


🔖 울프는 여자와 도시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1927년에는 플라뇌즈에 대한 탁월한 에세이를 썼다. 거리 산보를 울프는 "거리 배회(street haunting)"라고 불렀다. 에세이 속의 화자는 연필을 구하러 걸어서 런던을 횡단하며 주위를 관찰한다. 도시의 관찰자는 "지각이라는 굴의 핵심(**울프가 에세이에서 영혼의 외피인 껍질이 갈라지면 굴 속의 진주알처럼 거대한 눈만 남는다고 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이며, 보석을 찾는 광부도 아니고 다이버도 아니고, 뇌가 있는 어떤 것도 아니라 그저 도시를 따라 하류로 흘러가는 "거대한 눈"일 뿐이라고 울프는 말한다. 울프는 여성의 도시 경험이 남자와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깊이 의식한다. 이 글에는 런던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들도) 익명성을 누릴 수 있다는 울프의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겨울 저녁에 집 밖으로 나가 "샴페인 빛으로 빛나는 대기와 거리의 우호적 분위기"에 둘러싸인 관찰자는 '어둠과 가로등 불빛이 허락해주는 무책임함"으로 축복을 받은 기분이다. 거리에 있을 때 우리는 더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고 "도시 풍경의 기능"이 된다. 전에는 시선의 대상이었지만 거리 산보자가 되면 섹스나 젠더에서 벗어난 관찰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는 익명성의 외투를 두르고 종종 알 수 없는 도시처럼 우리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예를 들어 보행자들의 발걸음이 만드는 지도가 얼마나 혼란스럽게 보일지 상상해보라.)

그런데 산보가 산보자의 자아 정체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산보를 하면서 무엇을 보는지만큼이나 중요하다. 울프는 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드는 사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선택하여 배치했고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강화'하는 사물들. 그러나 이 배경에서 벗어나, "우리 영혼이 스스로의 집으로 삼기 위해 분비해서 만든 굴 껍데기 같은 외피"에서 나오면 우리는 "친구들이 아는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익명의 떠돌이들의 공화군의 일부가 된다."


🔖 바르다는 이 영화의 정서적 추동력은 클레오가 이미지에서 주체로 이동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시선의 대상'에서 '응시의하는 주체'로의 전환이다. 영화 초반에는 클레오가 받는 시선이 클레오의 기운을 북돋고 클레오가 스스로를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로 생각하게 만들지만, 클레오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다른 종류의 확신을 얻는다. 동네의 익숙한 광경을 자신의 죽음과 미모의 쇠락이 다가온다는 새로운 인식으로 바라보며 클레오는 인공적 자아를 버리고 마침내 차분한 자기의식에 도달한다. 도시는 클레오가 연민에 빠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바깥쪽을 바라보게 만든다.

클레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점에서만 생각하기를 그만두자 카메라도 클레오를 바깥쪽에서만 관찰하기를 그만두고 클레오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현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특히 여자는 스펙터클,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남자처럼 익명으로, 주위를 구경하면서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도전한다. 보이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본다는 것은 도시에서 여성의 자유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주체성의 순간은 클레오가 화면에서 사라질 때다. 이런 순간이 클레오가 보여지는 대신 보는 순간이다. 바르다는 이런 자유를 한 단계 더 넓힌다. 우리는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이 바르다라고 상상한다. 실제로 카메라를 다루는 사람은 바르다가 아닐지라도 카메라가 언제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포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르다이다. 카메라 앞에서 플라뇌즈가 진화하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지만, 클레오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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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가 한 이런 말이 유명하다. "영화는 여자 한 명과 권총 한 자루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바르다는 여자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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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르다의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어떤 것도, 어떤 상황도 제자리에 멈추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늘 바뀐다. 바르다의 세계에서 아름다움, 삶, 의미는 예기치 않는 것에 있다. 흐름으로부터 나온다. 영화 평론가 필 파우리는 바르다에게는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움직임, 변신, 변화가 중요하다."라고 했다. (...) 바르다는 페미니스트의 첫번째 행위는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시선의 대상이지만 또 나는 볼 수 있다." 바르다의 영화가 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과 세상 안의 우리 자리를 비스듬한 눈으로 보는 것. 우리는 이삭 줍는 사람, 플라뇌즈, 방랑자, 이웃이다. 객관성 따위는 없다.


🔖 겔혼은 평생을 세상의 방대함, 거대하고 압도적인 기대감과 싸우며 보냈다. "세상에 공간이 너무 많다. 나는 그것에 당황해 미칠 지경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이 충동은 일종의 사디즘이다. 나도 이제 스스로 이해하는 척하기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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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혼은 "객관성이라고 하는 헛소리"를 참지 못하겠다고 했다. 책임감 있는 저널리스트라면 중립을 지켜야 하고 주제를 모든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든는 말에 겔혼은 이렇게 반응했다. 객관성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따분하다. 겔혼은 어떤 시간과 장소의 느낌을 포착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이게 정말로 어떠한지 설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겔혼은 <콜리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저런 일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했다. 그녀가 그렇게 했다.'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말들이 과다라마로 가는 길의 땅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평평한 갈색 땅, 말라붙은 강바닥 옆에서 자라는 올리브와 참나무, 하늘을 배경으로 굴곡을 이룬 잘생긴 산들." 카파는 겔혼에게 "전쟁이 있는 곳에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는 일어나는 일들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겔혼은 한 위치만 차지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서 지내는 동안 겔혼이 지향하는 바도 계속 바뀌었다. "재앙이 나침반 바늘처럼 방향을 잃고 흔들리며 도시 사방을 가리켰다." 겔혼은 지리적 용어로 세상을 묘사했지만 객관적인 방향감각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다. 어떤 건축가를 만났는데 그는 "그날 배급 받은 빵"을 신문지에 싸서 들고 다녔다. "오전 내내 폐허 안에서 돌아다니고 물이 넘친 도랑을 뛰어 넘으면서 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다. 집에 무사히 가져가야만 했다— 집에 어린아이 둘이 있었으므로 죽음, 파괴, 어떤 일이 찾아오든 간에 빵을 지켜야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장성들의 회담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주는 대신 건축가와 아이들에게 빵 한 덩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들려주는, 일종의 미시보도인 셈이다.


🔖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우아한 연인>에서 브라이턴 비치에서 나고 자랐으나 맨해튼의 상류층 사회에 진입하려고 하는 여주인공은 신문 가판대 앞에서 예전에 알던 사람을 마주치지만 모르는 척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신문 판매원은 이렇게 말하다. "뉴욕에서 태어났다는 점의 문제가 바로 그거지. 뉴욕으로 도망갈 수가 없다는 것."